휴가가 며칠 남았는지 아세요?
저는 몰랐습니다. 알고 싶으면 물어봐야 했습니다.
그 숫자가 어디에 있었냐면요. 이사님 엑셀 파일 안에 있었습니다.
"물어봐야 아는 숫자였습니다"
제 휴가입니다. 그런데 제가 며칠 썼고 며칠 남았는지는 저보다 이사님이 더 잘 아셨습니다.
쓰려면 메일로 여쭤보거나 자리로 가서 여쭤봤고, 그러고는 답을 기다렸습니다.
(사실 그렇게까지 급한 일도 아니어서, 물어보기 애매하면 그냥 안 물어보고 넘어간 적도 많습니다.)
스무 명 남짓의 제조·연구 회사입니다. 저만 그런 게 아니었습니다.
"결재 시스템은 있었습니다"
없었던 건 아닙니다. 승인은 회의용으로 쓰던 협업 도구 안에서 하고 있었는데, 그게 그 도구를 만든 쪽이 직접 붙인 기능이 아니라 밖에서 가져다 붙인 것이었습니다.
일단 느렸습니다. 가끔은 너무 느려서 못 쓸 지경이었습니다.
정해진 항목만 됐습니다. 우리한테 필요한 칸이 없으면 있는 칸에 적어 넣었습니다. 결재 양식이 우리 일에 안 맞으면 우리가 양식에 맞춰야 하는 겁니다.
검색이 잘 안 됐습니다. 지난번 건을 어떻게 처리했는지 찾으려고 한참 뒤지다가, 결국 사람한테 물었습니다. 시스템에 다 들어 있는데 사람한테 물어보고 있으면 그게 시스템을 쓰는 겁니까?
그래서 사람들이 쓰기를 힘들어했습니다.
있는데 쓰기 힘든 도구가 제일 곤란하더라고요. 없으면 만들 생각이라도 하는데, 있으면 그냥 참게 되거든요.
"메일도 비슷했습니다"
바깥 고객과의 이야기는 대부분 메일에 있었는데, 받는 사람과 참조를 누구까지 넣을지가 늘 애매합니다.
그러다 보면 꼭 나중에 이렇게 됩니다.
"아, 이 팀도 넣었어야 했는데."
그때부터 필요한 것만 골라서 한 건씩 넘기게 되고, 받은 사람은 가운데 토막 하나를 받습니다. 앞도 없고 뒤도 없으니 무슨 얘기인지 파악하기가 어렵습니다.

세 가지를 놓고 보니 공통점이 하나 있었습니다.
정보가 사람한테 붙어 있었습니다.
그 파일을 가진 사람만 알고, 그 메일을 받은 사람만 알고, 그 결재를 올린 사람한테 물어야 압니다. 그래서 뭘 하려면 사람을 찾아야 했습니다.
여기서 막혔습니다. AI한테 "내 휴가 며칠 남았어?"라고 물어봐도, 그 숫자가 남의 엑셀 파일 안에 있으면 바로 답할 방법이 없으니까요.
AI를 붙일 데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순서를 바꿨습니다"
여기까지 오면 답이 뻔해 보입니다. 좋은 도구를 하나 사면 되겠다고요.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문제는 도구가 부족한 게 아니라 대화가 흩어져 있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흩어진 채로 도구를 하나 더 얹으면, 흩어질 곳이 하나 늘어납니다.
그래서 AI를 먼저 얹는 대신, 얹을 자리를 먼저 만들기로 했습니다. 첫 단계로 메신저를 슬랙으로 옮겼는데, 정작 도구를 깔기 전에 규칙부터 썼습니다. 도구만 바꾸면 단톡방이 하나 느는 것으로 끝나거든요.
지키고 싶었던 건 두 가지였습니다.
· 하나의 안건은 하나의 스레드에 둡니다. 스레드를 닫을 때 결정과 담당을 한 줄로 남깁니다
· 업무 요청은 개인 메시지 말고 채널에 남깁니다. 개인 메시지로 간 요청은 그 사람이 자리를 비우면 멈춥니다
이게 지켜지면 아까 그 잘린 메일이 안 생깁니다. 나중에 합류한 사람이 스레드를 위에서부터 읽으면 되니까요.
솔직히 말씀드리면, 스무 명 남짓이라 이걸 정하는 자리에 사람이 많이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큰 조직이면 이 문단이 훨씬 긴 이야기가 될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휴가나 승인처럼 기록으로 남아야 하는 것은 대화가 아니라서, 따로 자리를 만들어 붙였습니다. 회사 포털을 하나 만들어서 슬랙에 붙였습니다.

휴가하고 정산, 구매 승인이 여기로 왔습니다. 누가 처리했고 지금 어디까지 왔는지가 여기 남습니다.
지금은 슬랙 입력창에 /휴가확인 이라고 치면 됩니다. 총 13일, 쓴 건 1일, 남은 건 12일. 이렇게 바로 나옵니다.
누구한테도 여쭤볼 필요가 없어졌습니다.

사실 이걸 진작 했어야 하는 거 아니냐고 하실 수 있는데, 예전엔 길이 두 개뿐이었고 둘 다 막혀 있었습니다.
하나는 직접 만드는 것. 리소스가 많이 들어가는 큰 프로젝트라 시도조차 못 했습니다. 해볼 엄두를 낸 게 아니라, 아예 후보에서 빼놨습니다.
하나는 솔루션을 사는 것. 가격도 가격이지만, 기능이 너무 많았습니다. 스무 명짜리 회사에 안 맞는다고 생각했습니다. (쓰지도 않을 기능값까지 내는 거니까요.)
그래서 안 맞는 걸 참고 썼던 겁니다.
바뀐 건 AI로 코드를 쓸 수 있게 된 것입니다. 필요한 화면을 말로 설명하면 일단 돌아가는 것이 나옵니다. 한 번에 제대로 나오지는 않아서 보고 고치고 또 보고 고치는데, 그래도 예전처럼 큰 프로젝트라고 접어두는 것과는 다릅니다.
그게 몇 번 되는 걸 보고 나서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이제는 우리 걸 만들어도 되겠다."
그래서 만들었고, 지금도 회사 사정에 맞춰 고쳐 나가고 있습니다. 사서 쓰는 도구는 우리 사정에 맞춰 바뀌지 않는데, 우리가 만든 건 바꿀 수 있습니다.
저는 OpenClaw라는 이름으로 AI 자동화 컨설팅도 하고 있는데, 자주 받는 질문이 하나 있습니다.
"AI 도입하려면 회사 시스템을 갈아엎어야 하나요."
갈아엎을 필요는 없었습니다. 대신 흩어진 걸 한 군데로 모으는 건 먼저 해야 했습니다.
"막상 써보면 뭐가 달라지냐면요"
귀찮은 게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제 휴가 일수를 아는 데 두 사람이 필요했다는 게 문제였습니다.
예전이라면
· 숫자가 제 것이 아니라 한 사람의 파일 안에 있었습니다
· 저는 물어보고, 그분은 파일을 열어야 했습니다
· 두 사람을 거쳐야 한 줄이 나왔습니다
지금은
· 한 사람이 한 줄을 칩니다

"이런 분들께 특히 잘 맞습니다"
· AI를 도입하고 싶은데 어디서부터 손대야 할지 모르시는 분
· 정보가 특정 사람한테만 있어서 그 사람이 자리를 비우면 멈추는 조직
· 결재 도구가 있는데 쓰기 힘들어서 참고 계신 분
혹시 오늘 하나 해보실 게 있다면 이걸 권해드립니다.
우리 회사에서 어떤 숫자가 한 사람 파일에만 들어 있는지, 하나만 세어보십시오. 휴가일 수도 있고, 재고나 단가일 수도 있습니다.
그 숫자를 아는 사람이 자리를 비우면 뭐가 멈추는지까지 세어봤습니다. 저는 그러고 나서 어디부터 손댈지 정했습니다.
AI를 회사에 붙여보려다 알았습니다. 붙일 데가 없으면 아무것도 안 됩니다.
운영 규칙을 시행한 지는 나흘째입니다. 아직 결과라고 부를 만한 건 없습니다.
대화가 한 군데 모이고 나서야, 그제야 붙일 게 보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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